호모날레디(Homo nal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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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날레디(Homo naledi) - 발견 과정

작성일2019.01.03

발견 과정

터거와 헌터는 동굴 깊숙한 곳에서 ‘슈퍼맨 크롤(Superman’s Crawl)’이라고 리는 폭 25cm에 불과한 협착 지점을 힘겹게 통과했다. 이 지점은 대다수 사람이 날아가는 슈퍼맨처럼 한쪽 팔을 몸통에 바싹 붙이고 다른 팔은 머리 위로 쭉 뻗은 자세를 취해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 본격적인 탐사 도중에 몸집이 큰 버거 교수가 이곳에 몸이 끼어 사람들을 웃게 만든 적도 있다.

확대 ▲그림 8. 마치 슈퍼맨이 나는 자세처럼 손을 길게 뻗어야 통과할 수 있는 슈퍼맨 크롤을 빠져나가고 있는 리 버거 교수와 동굴 탐사가 (출처: 리 버거)

터커와 헌터는 비어 있는 큰 굴 하나를 가로지른 후 바위가 날카롭게 솟아있는 ‘용의 등뼈(Dragon’s Back)’라 부르는 암벽을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종유석들이 가득한 작은 공간이 있었다. 터커는 튀어나온 바위 부분에 발을 디딘 다음 다른 발로 아래쪽을 더듬었다. 빈 공간이었다. 그 빈 공간으로 뛰어내리자 비좁은 수직 통로가 나왔는데 통로는 어떤 곳은 폭이 20cm에 불과할 정도로 좁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깡마른 체구를 가졌기에 통로를 통과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의 몸집이 조금만 더 컸어도 지난 50년 이래 가장 중요한 인류 화석은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식명은 UW-101, 힘겨운 통로를 지나 ‘디날레디 방(Dinaledi Chamber, 별들의 방)’에 들어선 터커와 헌터는 안이 온통 유골로 가득 찬 것을 발견하였다. 2013년 10월 1일, 그들은 사진을 촬영하여 페드로 보쇼프에게 보여 줬고, 이 유골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 보쇼프는 리 버거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과거 리 버거의 학생이었던 보쇼프는 얼마 전 버거에게 탐사 임무를 제안받고 아마추어 동굴 탐사가인 터커와 헌터와 함께 스테르크폰테인(Sterkfontein) 계곡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보쇼프의 보고를 받은 리 버거 교수는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즉시 탐사팀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 놀랍고도 흥미로운 발견을 설명하기 전에 언급해야 할 또 하나의 발견이 있다. 바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Australopithecus Sediba)’의 발견이 그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의 발견

1970년대 이후 인류 진화에 관한 세간의 관심은 온통 동아프리카 대지구대(Great Rift Valley)에 쏠려 있었으며, 남아프리카는 흥미로운 곁가지에 불과했다. 버거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고, 오랫동안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가 우리 호모속의 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원시적인 종이라고 주장해 왔다.

일부 과학자들도 동의하면서 호모 하빌리스는 실제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속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진정한 최초의 호모가 발견될 것이라는 주장은 버거만의 생각이었다. 버거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호미닌 화석은 그를 ‘피해 다녔’으며, 20년간 주목받을 만한 발견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발견을 이루어내리라는 강력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200만~300만 년 전에 분기한 것으로 보이는 호모 속의 기원을 밝혀줄 실마리가 될 만한 화석이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연구 자금을 모았으며 강연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정적인 뼈나 화석이 없었다.

008년 그는 의외의 발견을 통해 중대한 발견을 한다. 당시에 새롭게 소개된 위성 이미지 지도 시스템인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자신의 연구에 이용하기도 마음먹은 버거는 구글 어스 입력창에 자신이 알고 있는 탐사 지역들의 GPS 좌표를 입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입력한 좌표들은 그가 그동안 알고 있던 계곡과 동굴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엉뚱한 곳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버거가 사용했던 휴대용 GPS가 군사적 악용을 막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오차가 발생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10년 만에 이러한 오차를 알게 된 버거는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130곳 이상 장소의 위치를 구글 어스를 이용하여 다시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버거는 수차례의 연구와 탐사로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인류의 요람’ 지역을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를 얻게 된다.

1924년 레이먼드 다트(Raymond Dart)가 ‘타웅 아이(Taung child)’로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 화석을 최초로 발견한 이후로 남아프리카 ‘인류의 요람’은 인류의 기원을 찾기를 원하는 수많은 과학자와 인류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탐험지였다. 그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 화석의 40%가 이곳에서 발견되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초기 인류 화석 유적지가 되었지만,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발견될만한 것은 모두 발견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버거는 남아프리카의 잠재력을 확신했다. 그리고 2008년 그의 삶을 영원히 변하게 할 첫 번째 발견을 마주하게 된다. GPS 오류 수정을 통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적지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진 버거는 인류의 요람 안에 위치한 말라파(Malapa) 보존 구역의 현장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당시 아홉 살이던 아들 매튜와 함께 백운석 덩어리에서 삐져나온 호미닌 화석의 일부를 발견한다. “아빠! 내가 화석을 찾았어요!” 화석을 발견했다는 아들에게 다가간 버거는 처음에는 그것이 그곳에서 흔한 영양의 화석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호미닌의 쇄골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버거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세디바 화석의 발견 순간을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화석을 자세히 살펴봤는데, 돌 뒤에 있는 것은 이빨과 송곳니가 튀어나온 아래턱뼈였습니다. 난 거의 죽을 것만 같았어요. 이걸 발견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버거와 동료들은 그 암석들을 힘겹게 조금씩 쪼개서 2개의 거의 완벽한 골격을 회수했다. 약 200만 년 된 이 골격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주요 발견이었다. 대부분 특징은 아주 원시적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현대적인 특징 또한 지니고 있었다.

확대 ▲그림 9.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 호모(Homo) 속을 닮은 남아프리카의 새로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종>이라는 제목으로 2010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

버거는 그 골격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새로운 종이라고 결론 내리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A. sediba)로 이름 붙였다.
세디바는 남아프리카 소토족(Sotho) 언어로 천연의 샘, 분수, 우물을 뜻한다. 세비다가 호모 속이 발생한 지점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버거는 세디바가 호모의 기원에서 ‘로제타 스톤(the Rosetta stone)’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고인류학계의 학자들은 버거의 “깜짝 놀랄만한 발견”은 인정했지만, 그의 해석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는 너무 최근의 것(178만 년~195만 년 전으로 추정)인 데다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원시적 특징과 현대적 특징이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존 가설에 따르면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에서 호모 속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뇌용량과 몸집이 커졌다. 그러나 세디바의 뇌는 커지지 않았다. 초기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사람 속인 호모 하빌리스의 특징이 혼합된 모자이크 형태를 보이는 세디바는 지금까지의 분류 체계와는 맞지 않는 호미닌 화석이었다. 현생 인류를 특정하는 특징들이 제각기 개별적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을 세디바가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초기 호모를 연구하는 많은 저명한 연구자들이 버거의 이름이나 그의 발견을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버거는 일부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에 개의치 않고 말라파의 남의 화석에 집중했으며 말라파 전역의 동굴 지도를 그리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처음으로 GPS를 사용하기도 했다.

호모 날레디의 발견

말라파의 세디바 화석 발견이 있은 지 5년이 지난 2013년 두 번째 발견이 버거에게 찾아왔다. 화석을 찾기 위해 버거가 고용한 동굴 탐사자이자 지질학자인 페드로 보쇼프와 스티븐 터커가 버거를 찾아왔다. 그들이 찍어온 사진을 보자마자 버거는 이제 말라파는 뒷전으로 물러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터커와 헌터가 라이징 스타 동굴을 탐험하다 발견한 길이 9m, 폭 1m의 좁은 공간의 바닥에는 뼈들이 지표면 위로 노출된 채로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터커와 헌터는 그것들이 오래된 뼈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화석과는 달리 돌처럼 보이지도 또 돌에 박혀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동굴 방에 던져 넣은 것처럼 그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온전히 치아가 남아 있는 아래턱뼈 조각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사람의 턱뼈처럼 보였다.

버거는 사진을 보는 순간 그 뼈들이 현대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특히 턱뼈와 치아의 형태가 너무나 원시적이었다. 사진에는 발굴해야 할 뼈들이 더 보였고, 버거는 두개골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는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유물은 대부분 온전한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초기 고인류의 화석 기록에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춘 골격의 수는 자신이 말라파 동굴에서 발견한 세디바의 골격 2개를 포함하여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뼈들이 발견된 것이다. 과연 이것은 누구의 뼈일까?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 동굴에 놓이게 되었을까?

동굴 탐험가 모집

사진 속 뼈들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버거는 이미 키가 180센티 넘게 훌쩍 큰 아들 매튜와 함께 라이징스타 동굴을 직접 찾았다.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내려갈수록 동굴은 좁아지고 거칠어졌다. 자신을 압박하는 동굴 틈 사이를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버거는 동굴의 마지막 구간인 수직 갱도를 통과하지 못하고 혼자 남게 된다. 다른 동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이 발굴과정이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들 매튜가 찍어온 동굴 내부 사진에서 버거는 호미닌의 하악골과 두개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몇몇 뼈가 최근에 손상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다른 동굴 탐험가가 동굴방에 들어왔음을 의미했다. 가장 급한 문제는 다른 동굴 탐험가들이 이 동굴 방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뼈들을 밖으로 빼내는 일이었다. 2013년 11월,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와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는 21일 동안의 라이징스타 동굴 탐사를 지원하고, 뒤이어 2014년 3월에는 디날레디 방에서 실시 될 4주간의 탐사비를 제공했다. 이 두 번의 장기 탐사를 위해, 버거는 다국적 연구팀을 구성한 다음 소셜미디어를 통해 여섯 명의 발굴 전문가를 모집했다. 그의 요구 조건은 과학 분야의 경력이 있고 동굴 탐사 경험이 있으며 ‘동굴 벽의 틈새를 통과할 정도로 날씬한 몸매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대 ▲그림 10. 동굴 탐사대원을 모집하는 리 버거의 페이스북 (출처: EBS 다큐멘터리)

버거는 곧바로 전 세계에서 수백 건의 이르는 문의를 받았고, 10일 만에 거의 60여 명에 이르는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작은 체형의 요건 때문이었는지 대부분이 젊은 여성이었다. 그는 지원자들 중 최종 후보에 들어간 열 명과는 스카이프(Skype)를 통한 화상 면접을 진행했다. 폐쇄된 동굴 내부에 단독으로 들어서 탐사를 진행할 지원자들이 외부의 연구진과 원활하게 소통할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이들 탐사원들이 디날레디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바닥 유물에 손상을 주지 않기 위해 어디를 밟고 지나가야 하는지를 화상 통화로 설명하는데 30분이 걸리기도 했다. 결국 발굴팀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한 명인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의 마리나 엘리엇(Marina Elliott)에 의하면, 여섯 명의 여전사들은 모두 ‘지하 우주비행사(underground astronaut)’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별명을 지은 버거는 ‘지하 우주비행사’라는 별명이 화석을 회수하기 위해 동굴 깊숙이 들어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그들에게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확대 ▲그림 11. 동굴 탐사대원을 모집하는 리 버거의 페이스북 (출처: EBS 다큐멘터리)

버거는 60여명의 과학자들을 모았고 지휘 본부와 과학 연구용 천막을 설치하고, 취침 및 지원 천막들로 이루어진 작은 천막촌을 세웠다. 3km에 이르는 전기선과 통신선을 화석이 있는 동굴 방까지 연결했다. 이제 지상의 지휘 본부에서 버거와 연구팀이 카메라를 통해 동굴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할 수 있었다.

확대 ▲그림 12. 라이징스타 동굴 입구에 설치된 베이스 캠프 (출처: 리 버거)

동굴 탐사 시작

확대 ▲그림 13.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캠프를 지나가고 있는 모습 (출처: 리 버거)

2013년 11월, 6명의 지하 우주비행사 중 마리나 엘리엇과 베카 페이소토(Becca Peixotto)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영상 및 안전 장비 등의 사전 작업을 위해서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동굴과 디날레디 방을 드나들었지만, 이 두 명은 디날레디 방에 들어간 최초의 과학자였다. (리 버거가 동굴에 끼어 디날레디 방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기억하자) “나는 동굴을 내려다보며 과연 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인류의 기원을 찾기 위해, 역사상 가장 어렵고 위험한 조건에서 화석을 수집하고 운반했습니다.”라고 엘리엇은 말했다. 이들은 3인조를 이루어 두 시간씩 교대로 작업하며 지표면에 있는 화석들의 위치를 기록한 후 화석들을 자루에 담았다.

고고학 유적지에서는 보통 연구자들은 커다란 격자 줄을 치고 격자의 좌표에서 유물의 위치와 깊이를 정확히 기록한다. 그러나 디날레디 방은 격자를 설치하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연구팀은 격자 대신에 3차원 스캐너를 이용해 동굴 방 전체의 위치를 기록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스캐너를 통해 동굴 표면의 가상 모델이 만들어진 후 탐사자들은 반쯤 땅속에 묻혀 있는 두개골 주변의 퇴적층을 조심스럽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두개골 아래쪽과 주변에는 많은 뼈들이 쌓여 있었다.

동굴 안으로 진입하는 것만큼이나 디날레디 방의 작업 역시 험난했다. 또 다른 동굴 탐사자인 엘렌 포이어리젤(Elen feuerriegel)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종종 자리를 바꿔야만 했어요. 누군가의 다리가 피로해지고 쥐가 나서 감각이 없어지면 주위의 아무것도 건드리지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 섬세하게 움직여야 했어요. 건너편에는 바위 하나 위에 발끝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이 있었고요. 우리는 모두 거미처럼 걸으면서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어요.” 며칠 동안 우주비행사들이 면적 1m2 정도의 두개골 주위를 조사하는 동안 지상의 다른 과학자들은 동영상 화면 주위에 모여 흥분 속에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버거는 이따금 연구용 천막으로 가서 쌓이기 시작하는 뼈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지휘 본부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돌아와 또 다른 발견 장면을 지켜보고는 했다.

화석 뼈들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았다. 동일한 신체 부위의 뼈들이 출토된다는 점을 통해서 볼 때 동굴에는 한 개체의 골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졌다. 사실 골격이 너무 많아서 정확히 집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 발굴에서 최소한 15명의 개체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이는 1550여 개가 넘는 뼛조각이 점토 성분이 풍부한 퇴적층(clay-rich sediments)에서 수습되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인류 조상의 화석이 발견된 유적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수이다.

탐사팀은 디날레디 방의 바닥 표면에서는 약 300개의 뼈를, 바닥을 파 내려가면서는 약 1250개의 뼈를 발굴해 냈다. 뼈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쌓였음을 시사한다. 이 표본들은 두개골, 턱뼈, 갈비뼈, 이, 거의 완벽한 발뼈와 손뼈, 그리고 내이뼈(inner ear bones)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인과 어린이 그리고 유아의 뼈에 해당되는 것들이 발견되었다. 화석 뼈 대부분이 관절이나 연결 부분에서 떨어진 것이지만, 퇴적물 가운데는 한 개체의 위아래 턱뼈가 연결된 것도 있었다. 관절이 분리된 채로 발견된 것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사체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확대 ▲그림 14. 호모 날레디의 발굴은 동굴 입구부터 동굴 내부, 동굴 밖의 현장 캠프, 대학 연구실까지 이러지는 광범위한 장소와 많은 인원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고인류학 분야에서는 화석이 새로 발견되면 자세한 분석을 거쳐 그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비밀을 유지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버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중요한 새로운 정보는 고인류학계의 모든 사람들이 되도록 빨리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든 신속하게 분석을 마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많은 인력을 동원해 뼈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버거는 다시 페이스북에 연구원을 모집하는 글을 올렸다. 버거는 말라파 화석의 분석에 도움을 줬던 20여 명의 과학자에 더해 페이스북으로 모집한 약 15개국에서 30명이 넘는 젊은 과학자들을 요하네스버그로 초청해 6주 동안 화석 연구 모임을 열었다. 일부 노장 학자들은 논문을 서둘러 발표하려고 젊은 학자들에게 먼저 화석을 보여 주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젊은 과학자들에게 이 작업은 “고인류학도로서 꿈을 실현하는 자리”였다고 미국 아칸소 대학교에 갓 임용된 루카스 델레진(Lucas Delezene)은 말했다.

날레디 알아가기

연구 모임은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에 새로 지어진 화석 보관실에서 진행되었다. 창문이 없는 이 보관실에는 화석과 모형이 진열된 유리 선반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에는 해부학 비교를 위한 다양한 연령에 따른 유인원, 사람들의 유골과 날레디의 화석과 비교하기 위해서 12곳 이상의 기관에서 빌려온 화석 주형들로 가득 차 있었다. 최종적으로 연구팀은 150개의 손과 손목뼈, 190개의 이빨과 이빨 뿌리, 100개가 넘는 발과 발목뼈를 갖게 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과학자들은 몸의 여러 다른 부분 또는 다른 형태 분석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두개골과 하악골 팀, 치아를 담당하는 팀, 발과 발목 팀 등으로 신체 부위별로 분석 조를 나눴다. 팀원들은 이 새로운 화석을 규명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중요한 특성을 찾기 위해 마지막 뼛조각까지 면밀히 조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확대 ▲그림 15. 오른쪽: 연구자들이 디날레디 방에서 발굴된 화석들을 신체 부위별로 배열하고 있는 사진. 한 장소에서 대량의 화석이 발굴되면 화석 사이의 비교 분석을 통한 연구가 가능해지는 이점이 있다. 한 개체(네오)가 완전하게 보존돼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개체가 대량으로 발굴된 호모 날레디는 호미닌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출처: 내셔널 지오그래픽)왼쪽: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 화석 보관실에 모인 다국적 연구팀은 날레디 유골의 분석을 위한 조사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했다. (출처: 리 버거)

루카스 델레진은 치아 화석을 맡았다. 이 치아들은 전문가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치아와도 달랐다. 몇몇 특징들은 놀라울 정도로 사람과 비슷했지만, 다른 특징들은 기이할 정도로 원시적이었다. 하체는 두 발로 서서 걷고 있었지만 상체는 여전히 나무타기를 즐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양면성은 다른 탁자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엉덩이를 가로질러 선을 그으면 위쪽은 원시적이고 아래쪽은 현대적이었어요. 발만 따로 발견했다면 현대의 부시먼이 죽었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미국 듀크 대학교의 고생물학자 스티브 처칠(Steven Churchill)은 말했다.

버거와 발굴팀이 봤을 때 이 화석은 호모 속에 속한 것이 분명했지만 그 어떤 다른 고인류와도 달았다. 날레디는 두개골과 하악골의 형태를 보면 호모 하빌리스,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렉투스와 공통점이 보였으나, 두개 기저와 상하악골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파생 형질의 독특한 조합을 보여 주었다. 뇌와 신체의 작은 크기에서 호모 에렉투스와 가장 가까워 보였지만 다른 특징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닮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유인원에 더 가까웠다. 이처럼 디날레디 방에서 나온 화석들은 이미 알려진 호모 속의 한 종으로 분류하는 데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새로운 종명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디날레디 방을 처음 발견한 지 2년이 지난 2015년 9월, 리 버거가 이끄는 60여 명의 다국적 연구팀은 남아프리카 인류의 요람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이 새로운 종을 공식 발표했다. 《이라이프(eLife)》에 실린 두 편의 논문에서, 연구팀은 “이번에 발견된 1,550개의 유골 조각들은 지금껏 아프리카의 단일 유적지에서 발견된 호미닌 종 샘플 중에서 최대 규모이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샘플은 동굴 속에 널려 있는 화석 중 일부분일 것으로 추정되며, 연구팀이 현재까지 복구한 유골은 최소한 15명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고대 인류의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디날레디 방의 탐사에 뒤이어 2017년 미국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 인류학자 존 호크스(John Hawks)와 리 버거가 이끄는 연구팀은 라이징스타 동굴 안의 또 다른 동굴 방에서 호미닌 화석을 발견했다. 세소토어로 ‘빛’이라는 뜻의 ‘레세디(Lesedi) 방’으로 불리는 새로운 동굴 방은 최초의 호모 날레디 화석이 발견된 디날레디 방에서 약 100m 떨어져 있다. 레세디 방 역시 접근하기가 너무 어려워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기고, 오르고, 몸을 숙여 빠져나가야만 했다.

연구팀은 레세디 방에서 130개 이상의 새로운 호모 날레디 화석을 조사했다. 레세디 방에서 발견된 화석은 성인 2명과 어린이 1명 등 3명에 해당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발굴이 진행되면 더 많은 유골 화석이 발굴될 것으로 믿고 있다. 5세 이하로 추정되는 어린이 유골 화석은 머리와 몸체 뼈가 발견되었고, 성인 중 하나는 턱뼈와 무릎뼈로 연령대를 확인했다. 화석들은 연대 측정 결과 26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새로운 화석 중에는 ‘멋지고 완벽한 두개골’이 포함되어 있다. 선물을 의미하는 세소토어인 ‘네오(Neo)’라고 이름 붙인 세 번째 해골은 놀랍도록 완벽하다. 네오의 두개골은 매우 공을 들여 복원되어 좀 더 완벽한 호모 날레디의 모습을 보여 준다.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와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 소속된 피터 슈미트(Peter Schmid)는 연약한 두개골 뼈를 재건하는 데 수백 시간을 들인 후 “마침내 호모 날레디의 얼굴을 보게 됐다.”라고 말했으며, 호크스는 새로운 두개골 화석은 섬세한 안구 부위와 코뼈를 포함해 많은 얼굴 뼈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버거는 “네오의 골격 뼈는 두개골과 아래턱뼈가 보전된 유명한 ‘루시’ 화석보다 기술적으로 더 완전한, 지금까지 발견된 고인류 화석 중 가장 완벽한 것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루시(Lucy)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320만 년 전의 여성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유골 화석으로, 처음으로 직립 보행을 한 인류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확대 ▲ 그림 16. 네오(Neo)의 두개골 화석(위)과 두개골을 복원한 모형(아래)

두개골뿐만 아니라 다른 뼈를 통해서도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크스는 “네오의 골격 뼈에는 완전한 쇄골과 거의 완전한 대퇴골이 있어서 호모 날레디의 덩치와 키를 재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호모 날레디가 효과적으로 보행을 하고 기어오르기에도 능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라고 덧붙였다. 척추뼈도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네안데르탈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날레디와 레세디, 2개의 방에서 수집된 호모 날레디 유골 화석이 결합함으로써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이외의 다른 인류 계통에 대한 가장 완전한 기록이 나오게 되었다. 호크스는 “레세디 방에서 새로운 유골 화석이 발견됨에 따라 적어도 18개체의 골격을 재현할 수 있는 2000개의 호모 날레디 표본을 보유하게 됐다.”며, “이것은 네안데르탈인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멸종된 종이나 인류 계통의 표본보다 많은 숫자”라고 설명했다. 과학 저널 《이라이프》에 발표된 일련의 논문에 따르면 레세디 방에서의 발견은 22만 6000~33만 5000년 전 사이에 호모 날레디가 현생 인류 및 다른 초기 인류 종과 공존했다는 ‘그림’을 완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호크스는 “호모 날레디는 뇌의 크기가 인간의 3분의 1 정도로 오렌지만한 매우 작은 크기로 인간과는 명백하게 다르다.”라고 말하며, “그런데도 매우 깊은 행동 양상, 즉 다른 이가 사망한 후에도 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 문화 활동의 가장 깊은 뿌리를 보는 것 같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