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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트다운(Piltdown)

Introduction

필트다운을 둘러싼 논쟁

밝혀진 진실

필트다운 발견에 대해 '정확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어떤 집요하고 끈질긴 의심이 없었다면 거기서 이야기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1920년대와 30년대 동안 인간 진화의 나무에서 정확히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없었다. 도슨이 처음 서섹스에서 뼈를 만들었을 때, 작업할 수 있는 비교 자료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초기 인류의 화석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혈통을 해석하는 방법을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화석 발견이 이루어짐에 따라, 인간의 머리와 유인원과 같은 턱을 가진 호미닌이 다른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화석 유적들은 인간과 유사한 치아와 턱이 인간의 발달에 있어서 매우 초기 특징이었던 반면, 뇌와 이마는 점점 더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필트다운인은 이러한 주요 특징들을 반대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필트다운에 정통성을 부여했던 저명한 학자들도 대부분 고인이 되면서 그동안 화석에 대한 의심을 누르고 있던 권위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사실 필트다운 화석은 젊은 고인류학자들에게는 곤란한 화석이었다. 시카고대학교와 캘리포니아 주립 버클리 대학에서 인류학을 연구한 셔우드 워시번Sherwood Washburn은 대학원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필트다운 화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1944년 인류의 진화에 대한 논문을 쓴 일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필트다운인을 단순히 제외해 버렸다. 필트다운인을 끼워 넣으려고만 하지 않으면 인류의 진화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 태생의 인류학자 조지프 위너Josehp Weiner 역시 다른 화석 기록들과 필트다운인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없었다. 다른 화석들을 통해 볼 때, 필트다운의 화석은 단 하나의 동물에서 유래할 수 없었다. 필트다운인은 고대 그리스 전설 속에 나오는 사자 머리에 염소 몸통, 뱀 꼬리를 가진 괴물 키메라처럼 인간과 유인원의 키메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위너는 옥스퍼드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윌프리드 르 그로스 클라크Wilfrid Le Gros Clark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의 해부학부에 보관된 필트다운인의 석고 모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미경으로 본 어금니에서 마치 줄칼로 만든 것 같은 인위적 흔적이 발견되었다. 두 사람이 보기에 필트다운인은 명백한 가짜 화석이었다.

필트다운 화석이 가짜라는 결정적 증거는 ‘불소 연대 측정법’ 덕분이었다. 19세기에 이미 화석의 불소 함량이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것을 화석에 적용해 보면 같은 퇴적층에서 나온 화석들은 같은 값을 가질 것이다. 불소 검사는 연구자에게 caborn-14 검사나 다른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검사처럼 절대연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검사로 테스트하는 물질과 같은 연대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만약 검사하는 물질이 같은 양의 불소를 가진다면, 그것은 이 물질들이 같은 환경에서 같은 양의 불소를 흡수했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에 해당 물질들은 같은 연대일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을 이용해 대영 박물관의 화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케네스 오클리Kenneth Okley는 불소를 이용한 화석 연대 측정법을 고안했다. 필트다운 화석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 오클리는 필트다운인과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 동물 화석들이 훨씬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오클리에게 위너와 클라크가 먼저 연구를 제안하면서 오클리는 필트다운 두개골의 각 부분의 연대 측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3년 11월 21일 오클리, 위너, 클라크 세 명의 과학자는 다음과 같은 논문을 발표한다.

“우리가 손에 넣은 증거에 의하면, 필트다운 발굴에 참여한 저명한 고생물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매우 정교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사기극의 희생자였음이 분명해졌다……. 필트다운 조각들이 하나의 개체에 속해있다고 주장한 사람들 혹은 오리지널 표본을 검사한 뒤, 아래턱뼈와 두개골을 유인원의 것으로 보거나 그럴만한 증거가 없다고 한 사람들 모두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아래턱뼈와 두개골의 조작이 놀랍도록 교묘했으며, 고생물학 발견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기의 형태가 너무나 비양심적이며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필트다운 화석은 인간 두개골, 오랑우탄의 턱뼈, 침팬지의 이빨을 조합해 만든 것이었다. 고배율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아래턱뼈의 이빨 표면 사이로 가는 줄이 보였다. 이것은 종의 정확한 확인을 어렵게 하려고 유인원 어금니를 매끄럽게 다듬은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유골 전체가 더 오래되어 보이기 위해서 짙은 색의 철분과 크롬산 용액으로 착색한 것도 알아냈다. 필트다운인은 명백한 가짜였다.

확대 ▲ 그림 12. 필트다운이 가짜라고 밝혀진 후 '필트다운인 문제'라는 제목의 전시를 보는 두 남자의 사진. 사진작가는 이 사진에 “Goodbye missing link”라는 제목을 붙였다. <출처 게티 이미지>

결국 1953년 영국 자연사 박물관은 필트다운인을 가짜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필트다운 사기가 밝혀졌지만 이미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필트다운인은 과학자들을 수십 년 동안 인간 진화를 이해하는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과학자들은 그것이 잃어버린 고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필트다운인의 내러티브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진짜 발견에 회의적이었다. 1924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타운 아이Taung Child의 발견처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진 발견의 경우 특히 그랬다.

과학계뿐만 아니라 영국 정치계에서도 조작 사건에 의문을 나타냈다. 조작이 밝혀진 지 며칠 만에, 영국 하원은 필트다운에 대에 “하원은 대영 박물관 이사회를 신뢰할 수 없다. 필트다운인의 두개골이 완전히 가짜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견해를 밝히고 대영박물관 이사회 해임에 관한 회의를 소집했다. 대영 박물관은 하원의 현장 조사뿐만이 아니라, 1953년 필트다운 유적지를 영국의 고고학 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보존 자격과 투자금을 책정한 국제자연보호협회The Nature Conservancy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존 자격은 재빨리 취소되었다.

범인은 누구?

확대 ▲ 그림 13. 필트다운 사기사건의 용의자는 40여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유명 추리 소설가인 아서 코난도일도 있다. 코난도일의 고향과 필트다운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지만, 그가 범일이라고 생각하는 기사나 책도 출판되었다. <출처 게티 이미지>

화석이 조작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어떻게 이런 사기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었나 과학계와 대중 모두가 궁금했다.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누가? 40년간이나 과학자와 대중을 속인 이 정교한 사기를 저질렀을까?”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화석의 정체를 밝힌 오클리를 포함해 몇몇 과학자들이 특집기사를 쓰고 필트다운 시나리오와 관련된 사람들의 인터뷰와 기록을 종합하기 시작했다. 용의 선상에 오른 이들은 최대 4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후보는 화석의 발견자인 찰리 도슨이었다. 필트다운의 주요 연구자인 스미스우드와 샤르댕은 물론이고 저명한 과학자인 윌리엄 솔라스William J. Sollas와 아서 키스도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유명 소설가인 코난 도일도 발굴 현장을 몇 번 방문했다는 이유로 조작을 계획했다는 주장도 있다.

본업이 의사인 코난 도일은 해박한 의학 지식은 물론, 필트다운 지역에 관해서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트다운 화석과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씩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우드워드는 이 화석의 주요 연구자이자 발굴자였다. 인류 진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화석은 그에게 명예와 유명세를 주었다. 우드워드의 전문 분야인 화석 어류로는 결코 얻지 못할 명성이었다.

세간에서는 신부인 테야르가 위조범이거나 아니면 위조범의 고백성사를 담당한 신부일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테야르는 거짓을 알고 그림 화가 존 쿡John Cooke의 그림(1915년)은 1913년 8월 11일 왕립 외과대학에서 열린 모임을 예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주요 참가자들은 “최초의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필트다운맨의 화석 주위에 모여 있다. '필트다운 두개골 토론'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1913년 8월 11일 오후 왕립 외과대학에서 열린 회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험 가운을 입은 아서 키스가 필트다운 두개골을 검사하는 테이블에 앉아 있다. 키스의 왼쪽에는 골학자osteologist 윌리엄 피크래프트William Pycraft 와 동물학자 레이 랭케스터Ray Lankeste가 앉아 있다. 런던 킹스칼리지 치과외과 교수인 아서 언더우드Arthur Underwood가 키스의 오른쪽 앞에 서 있다. 뒷줄에는 스미스 우드워드와 찰스 도슨, 해부학자 그라프턴 엘리엇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자연사박물관 지질학과 기술조교 프랭크 바로우Frank Barlow가 있다. 뒤쪽 벽에는 찰스 다윈의 초상화 걸려있다. 있었지만 성직자로서 비밀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확대 ▲ 그림 14. 화가 존 쿡John Cooke의 그림(1915년)은 1913년 8월 11일 왕립 외과대학에서 열린 모임을 예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주요 참가자들은 “최초의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필트다운맨의 화석 주위에 모여 있다. '필트다운 두개골 토론'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1913년 8월 11일 오후 왕립 외과대학에서 열린 회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험 가운을 입은 아서 키스가 필트다운 두개골을 검사하는 테이블에 앉아 있다. 키스의 왼쪽에는 골학자osteologist 윌리엄 피크래프트William Pycraft 와 동물학자 레이 랭케스터Ray Lankeste가 앉아 있다. 런던 킹스칼리지 치과외과 교수인 아서 언더우드Arthur Underwood가 키스의 오른쪽 앞에 서 있다. 뒷줄에는 스미스 우드워드와 찰스 도슨, 해부학자 그라프턴 엘리엇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자연사박물관 지질학과 기술조교 프랭크 바로우Frank Barlow가 있다. 뒤쪽 벽에는 찰스 다윈의 초상화 걸려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심의 한 가운데 찰리 도슨이 있었다. 필트다운 화석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6년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한 뒤, 즉 도슨이 필트다운 발굴 작업에 관여하지 않고부터는 그 발굴지에서 어떤 화석도 발견되지 않았다. 찰스 도슨은 어린 시절부터 헤이스팅스 주변의 해안, 절벽, 채석장에서 나온 표본을 수집하는 화석 수집가였는데, 그중 상당 부분을 대영 박물관의 자연사 박물관에 기증했다. 본머스 대학Bournemouth University의 고고학자 마일스 러셀Miles Russell은 도슨의 수집컬렉션을 분석한 결과 최소 38개가 가짜라고 결론 내렸다. 파충류와 포유류를 섞은 뒤 플락키아우락스 다우소니Plagiaulax dawsoni라고 이름 붙인 이빨, 헤이트 성의 벽에서 발견했다는 특이한 돌도끼, 고대 로마시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여러 양식이 뒤섞인 보트 등은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러셀은 “찰스 도슨이 필트다운 사기극의 궁극적인 설계자, 창작자, 선동자,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밝히면서 "필트다운인은 도슨이 한번 저지른 일이 아니라, 그의 일생에 걸쳐 만들어 낸 위조품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었던 셈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도슨이 과연 많은 전문가를 속일 정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 칼럼니스트가 위조가 밝혀졌을 때 지적했듯이, 이 사기 사건의 범인은 인류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발굴 현장을 잘 꾸밀 수 있는 지질학자였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뼈에 숙련된 해부학자였으며 현대의 치아를 선사시대 치아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치과 의사이자 표본을 고대의 유물로 보일 수 있게 한 화학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5백 년 된 오랑우탄의 턱은 어떻게 구했을까? 1912년 서섹스에서 이러한 것들을 수집하고 꾸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굴 장소에서 함께 발견된 마스토돈 이빨 역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최근 우라늄 측정법을 통해 알려진 바로 그 이빨은 튀니지에서 온 것이었다.

필트다운인은 영국인의 자긍심으로 이루어진 학명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로 빛나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단지 ‘필트다운 사기’로 기억된다. 어떻게 가짜 화석이 50년간이나 진짜로 대접받을 수 있었을까? 셀 수 없이 많은 기사, 전공논문과 블로그의 글들이 이 사건의 내막을 밝히려고 애쓴다. 공룡에서부터 호미닌에 이르는 화석 역사상 필트다운보다 더 연구되고 책이 출판된 화석은 없을 것이다. 1차적으로는 화석에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트다운 화석을 직접 보고 연구한 학자는 매우 드물다. 필트다운 화석의 관리자들은 화석의 보전을 이유로 실제 유골에 접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외부 연구자가 그 뼈를 보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만지는 것은 금지되었다. 오직 석고로 만든 모형으로만 연구가 가능한 현실에서 인공착색이나 치아의 마모 정도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정한 교훈은 믿음과 결합한 과학의 위험한 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훌륭한 과학자들조차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주는 이론과 증거를 만났을 때, 과학적 엄밀함을 등한시했다. “스미스 우드워드가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그런 속임수에 넘어간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국에서 인류 조상의 증거를 찾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지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집착은 그 끝이 없지요……. 바로 그 점이 필트다운 조작이 영리하고도 성공했던 이유에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찾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나타났던 거지요” 과학 역사학자인 캐롤라인 쉰들러Karolyn Schindler는 화석 발견과 관련된 전후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확대 ▲ 그림 15. 한때 영국의 자랑이었던 필트다운 화석은 이제는 여관이나 주점, 레스토랑의 이름으로 나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스미스 우드워드의 저명함이 화석 발견에 지나친 신용을 부여해 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필트다운에 관련된 그 모든 저명한 과학자들 대부분이 화석에 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누가 그런 사기를 상상이나 했을까요?” 쉰들러의 표현처럼 영국의 과학자들이 필트다운 사기에 속은 것은 그 화석이 당시 영국이 ‘찾길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필트다운 화석은 조잡하게 만들어졌을지 모르지만, 그 발견은 과학자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했다. 영국이 바라던 화석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과학적인 테스트를 하지 않았다"고 러셀 교수는 말한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화학 물질로 얼룩지고, 이빨이 줄칼로 갈렸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너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밝혀진 진실, 범인은 바로..

2016년 리버풀, 런던, 케임브리지 및 캔터베리 등 영국 여러 기관의 다분야 팀은 최신의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필트다운 표본을 조사해서 위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밝혀내는 논문을 에 발표했다. 논문 에 따르면 연구진은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서섹스 마을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개의 위조 표본에 사용된 방법을 비교한 결과, 매우 일관성 있는 작업 방식을 발견했다.

  • 적갈색 얼룩을 발라 뼈가 오래돼 보이게 했다.
  • 표본들은 그 틈새에 필트다운의 자갈이 들어있었다.
  • 치과용 접착제가 치아와 자갈을 고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확대 ▲ 그림 16. 1950년대 초 검사를 통해 오랑우탄의 것으로 밝혀진 송곳니는 흥미롭게도 도슨이 두개골, 하악골, 부싯돌, 동물 유적을 착색하기 위해 중크롬산염 용액에 담근 방법과는 달랐다. 송곳니는 '거칠고 유연한 페인트와 같은 물질로 일반적인 유기 용매에서는 녹지 않는 것‘으로 착색되어 있었다. 이 칠해진 표면 아래의 “이빨은 지극히 희다”는 송곳니를 조사한 조셉 와이너 표현처럼 송곳니는 현대의 것이었다. 와이너에 따르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해온 다른 화석 부위와 달리 송곳니는 갑자기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다. 하얀 치아가 화석화되고 자갈로 얼룩져 보이게 하기 위해서 도슨은 아마도 페인트를 사용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출처 런던 자연사 박물관>

이 작업 방식은 유인원과 인간의 뼈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12년에 턱뼈와 두개골 파편이 발굴된 필트다운 1구역과 도슨이 1915년에 일치하는 치아와 두개골 조각을 찾았다고 주장한 필트다운 2구역 두 곳을 연결하기도 한다.

확대 ▲ 그림 17. 과학의 발전으로 50년 동안 수수께끼였던 필트다운 조작의 범인은 찰스 도슨으로 밝혀진 듯하다. 그러나 단지 흥미로운 가십거리로 필트다운을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고 필트다운인이 주는 과학 연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또 다른 필트다운 사기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개인의 희망이나 문화적 편견이 과학의 이해를 해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필트다운의 진정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연구를 주도한 영국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Liverpool John Moores 그림 Piltdown I 송곳니(a)의 µCT 스캔, 1925년 Piltdown 송곳니 (b)의 방사선 촬영에서 송곳니 치수강pulp chambe 내안에 약 15개의 자갈이 들어있었다. 지금은 검사를 위해 4개만이 남아있다. 외이도external acoustic meatus와 구명에 자갈이 들어 있는 Piltdown I의 관자놀이, 필트다운 발굴지 자갈의 µCT 스캔(d), 치수강에 자갈이 들어있는 Piltdown II 어금니의 µCT 스캔(e), 뿌리에 자갈이 있는 Piltdown II 어금니(f) <출처 Isabelle De Groote> University의 이사벨 드 그로트Isabelle De Groote박사는 "여러 개인이 가짜 화석을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우리의 분석은 모든 다른 표본과 두 발굴지 (필트다운 1구역과 필트다운 2구역) 사이의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이 작업이 한 명의 위조범 찰스 도슨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은 분명합니다.”고 말했다. 필트다운 1구역 필트다운2 구역에 연결된 유일한 사람은 찰스 도슨이다. DNA 분석결과 첫 번째 필트다운 유적지에서 나온 송곳니와 두 번째 유적지에서 나온 어금니는 하나의 오랑우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됐다.

이 송곳니와 어금니는 보르네오에서 사는 오랑우탄 종류인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자들은 이 오랑우탄의 아래턱이 당시 유행하던 이국적인 물건을 판매하는 박물관이나 골동품 상점에서 구매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또 다른 위조 기법이 있었다. 3D X선 영상촬영을 통해 관찰한 결과 두개골 뼈와 치아에 많은 구멍이 있었고 그 안은 작은 조약돌이 채워져 있었는데, 이것은 필트다운 현장에서 발견된 자갈과 같은 것이었다. 연구팀은 보통 화석이 뼈보다 무게가 더 나가기 때문에 뼈를 더 무겁게 만들려고 일부러 자갈을 첨가했다고 생각한다. 자갈을 넣은 두개골 뼈의 구멍 역시 치아를 고정하는데 썼던 치과용 접착제로 막았다.

확대 ▲ 그림 18. Piltdown I 송곳니(a)의 µCT 스캔, 1925년 Piltdown 송곳니 (b)의 방사선 촬영에서 송곳니 치수강pulp chambe 내안에 약 15개의 자갈이 들어있었다. 지금은 검사를 위해 4개만이 남아있다. 외이도external acoustic meatus와 구명에 자갈이 들어 있는 Piltdown I의 관자놀이, 필트다운 발굴지 자갈의 µCT 스캔(d), 치수강에 자갈이 들어있는 Piltdown II 어금니의 µCT 스캔(e), 뿌리에 자갈이 있는 Piltdown II 어금니(f) <출처 Isabelle De Groote>
확대 ▲ 그림 19. Piltdown I M1: (a,b) 사진 및 CT 스캔의 표면 수정은 부자연스러운 수평면 끝부분의 제거와 설측연Lingual margin의 에나멜이 재구성 된 것을 보여준다. (c) Piltdown I M1: 에나멜 (d), 상아질 (e), 복원용 접찹제 (f) 얼룩진 에나멜 (g)의 표면 수정 흔적 <출처 Isabelle De Gro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