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외과수술

정신의학의 역사

정신외과수술

작성일2023.08.31

전두엽 백질절개술Frontal Leukotomy 및 정신외과수술

개요

1919년 일부 연구자들이 조현병 환자의 신경병리학적 변화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20세기 초에는 아직 수술로 치료할 만한 전두엽의 병리적 증거는 없었습니다. 아직은 전두엽 기능에 대한 지식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뇌를 수술하는 것은 1936년 포르투갈의 신경외과 의사 에가스 모니스Egas Moniz가 전두엽 백질절개술을 소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확대 ▲ 에가스 모니스(1874-1955)
1949년 뇌엽절제술의 치료적 가치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

1868년 철도공사 감독관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가 공사 중 사고로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으나 생존하였고, 그의 사례를 통하여 전두엽의 손상이 영구적이고 심각한 성격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학자들은 제 1차 세계 대전 후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참전 군인들을 대상으로 전두엽 병변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를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전두엽 피질의 병변은 성격, 정서 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기술했습니다. 그 연구에는 제한점이 많았지만 전두엽이 인지 및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로 외과적 접근이 고려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49년 정신외과의 개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모니스는 왜 전두엽을 수술 부위로 선택했을까요?

정신외과수술의 기원

모니스가 외과적으로 정신질환 치료를 시도한 최초의 사람은 아닙니다. 천두술trepanation은 4,000∼5,000년 전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사용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아시아, 멜라네시아, 뉴기니, 타히티, 뉴질랜드, 시베리아 및 에티오피아 지역으로 전파 되었습니다.

스위스 정신병원에 근무하던 부르크하르트Burckhardt는 뇌 국소화에 관한 초기 연구들을 기반으로 정신질환 치료를 위한 신경외과적 접근을 처음으로 고안했습니다. 그는 6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여 환자의 전두엽 및 측두엽 피질을 단계적으로 제거하고 1891년에 그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조롱당했고 무모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한 환자는 수술 직후 사망했고, 다른 두 환자는 경련성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학회는 수술을 중단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후 1910년까지 수술적 시도는 이루이지지 않았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경외과의사인 푸셉Puusepp은 조울증을 앓고 있는 3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전두엽과 두정엽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섬유를 절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두엽 백질절개술의 출현 전까지 자신의 수술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1935년 모니스는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국제 신경학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침팬지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 결과가 발표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침팬지의 전전두엽 피질을 양쪽 모두 제거했는데, 뇌엽절제술 후 동물들은 감정적 반응 없이 반복적인 오류를 보였습니다. 모니스는 강의가 끝날 때 일어나 이러한 수술을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수행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질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회고록에서 모니스는 침팬지 실험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없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침팬지 실험 2년 전에 이미 신경외과적 접근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했다고 밝혔습니다.

모니스는 전두엽 수술로 발생하는 성격과 행동의 문제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36년 백질절개술에 대한 그의 첫 논문에서 뇌종양으로 양측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환자에서 나타난 임상 증상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 및 성격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두엽을 외과적으로 절개하는 것의 효과가 중증 정신질환으로 인한 고통을 능가한다고 강력하게 믿었습니다. 그는 신경세포가 내부 및 외부의 지속적인 자극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패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는 이러한 패턴이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에서는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망상 및 강박적 사고와 같은 증상을 유발한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는 전전두엽에서 다른 뇌 영역으로 가는 섬유를 차단함으로써 이러한 병적으로 고정된 연결을 제거할 수 있고, 비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완화하고 회복을 촉진할 수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모니스의 결과가 부르크하르트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니스는 대뇌 혈관조영술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이미 국제적으로 존경 받는 학자였습니다. 수술은 처음에는 열광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정신질환을 가진 20명 환자의 전두엽 백질절개술 후 임상적 호전을 보고했고, 이후 그의 보고가 브라질,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의 연구자들에 의해 인정받았습니다. 관련된 이환율이나 사망률이 없다는 사실은 시술이 매우 간단하고 무해한 것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1930년대 초까지는 정신병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조현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슐린을 사용하여 저혈당 혼수 또는 발작을 유도하거나, 약물로 발작을 유발하는 것이 정신병적 증상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체요법somatotherapy 또는 쇼크치료는 모니스와 유사하게 꽤 기발한 가설에 기초하고 있었고, 때때로 정신병적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전이 되더라도 비교적 기간이 짧았으며, 일반적으로 몇 달에서 1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인슐린 유발 혼수는 1%의 사망률을 보였고, 약물 유발 발작과 전기 충격 치료는 수많은 골절 환자를 만들었습니다.

신체요법에 호전을 보이지 않는 환자들을 비롯한 정신질환자들에게 더 나은 결과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정신외과수술의 임상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미 1936년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의 사설이 정신외과를 조심스럽게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편집자는 “숙련된 신경외과 의사가 적절하게 장비를 갖춘 병원에서 집도한다면 난치성 우울증 환자에게 수술을 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수술은 만성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술 기법의 소개

완전 뇌엽절개술은 점차적으로 다양한 선택적 수술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미국의 외과의사 윌리엄 스코빌William Beecher Scoville은 안와피질 하부절개술 기법이 정밀한 수술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수술이 기분을 좋아지게 하고, 불안감을 완화하며, 성격 둔화를 최소화하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다양한 형태의 뇌엽절개술.

(1) A, 스코빌Scoville의 안와피질orbital 하부절개술undercutting. B, 스코빌의 상부궁융부superior convexity 하부절개술. C, 그랜섬Grantham의 하부안쪽사분면 전기응고. D, 스피겔Spiegel과 와이시스Wycis의 시상핵 전기응고.
(2) A, 스코빌의 대상회 하부절개술. 리빙스턴Livingston의 대상회 피질하 절편술. B, 프리먼과 와츠의 폐쇄형 표준 뇌엽절개술, C, 매켄지McKenzie의 백질절개기leucotome 방식, 슈와르츠Schwartz의 비경 방식, 그랜섬의 전기소작법과 포펜Poppen의 직시direct vision 흡입 및 주걱 방식.
(3) A, 라이얼리Lyerly와 포펜의 직시 개방형 표준 뇌엽절개술. B, 피암베르티Fiamberti와 프리먼의 경안와뇌엽절개술.
▶ 안와피질 하부절개술 기법을 보여주는 그림.

1.5인치 관상톱(왼쪽 아래, b); 양쪽 안와 상부 관성톱 구멍(왼쪽 위, a); 하부절개술 기법을 이용한 회백질 분리 방법, 흡입 튜브 및 주걱 겸자 이용(오른쪽 위 및 중앙 그림, c); 하부절개술로 절개되는 안와 피질의 영역(오른쪽 아래, e); 아래에서 바라본 수술 부위(오른쪽 아래, e); 전두엽 끝부분의 피질 절개 부위(하부 중앙, d)
A, 수직선들은 절개되는 피질과 대상회의 영역을 나타냅니다.
B, 표준 안와피질 하부절개술 작업.
C, 중격까지 확장된 잘못된 하부절개술은 의식장애, 발작 및 혼란 상태를 초래합니다. 대상회(c.g.), 뇌량(c.c.) 및 뇌궁(f).

정신외과수술 시 고려 사항

처음에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주로 정동장애, 강박신경증, 건강염려증 및 기타 다양한 정신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누가 수술을 받아야하는지 결정하는데 있어 임상 증상의 성격과 강도가 진단명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진단은 사실 수술 대상의 선정과 큰 관련이 없었습니다. 환자가 사회적 기능의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으며 더 이상 치료에 반응하지 않고, 질병의 심각성이 수술 후 성격 변화에 대한 우려를 능가하는지 여부가 더 중요했습니다. 정서적 문제로 인한 심한 고통과 함께 초조, 자살 또는 살인 성향을 가진 환자들은 긍정적 치료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좋은 후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 몇 명의 조현병 환자가 수술을 받았지만 모니스의 조현병 환자 7명 중 누구도 눈에 띄는 호전을 보이지 않았고, 미국의 프리먼Freeman과 와츠Watts가 수행 한 첫 80건의 수술에 포함된 조현병 환자 12명도 뚜렷한 호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미네소타, 영국의 연구자들이 치료 불응성 조현병 환자에서 백질절개술 후 상당한 증상 호전을 주장하면서 정신외과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고 프리먼과 와츠는 조현병에 대한 수술적 치료를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치료 불응성 환자들에게서 부분적인 성공을 경험한 후 신중한 접근 방식을 유지하며 수술을 계속했습니다. 프리먼은 조현병 환자가 위축, 무관동, 무의욕 상태로 악화되는 징후를 보이기 전에 수술을 받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암성 통증, 신경통 또는 환상 사지 통증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같이 난치성 통증이 있는 환자들 또한 정신외과수술(대부분 뇌엽절개술)을 받았습니다.

합병증들

1953년 제 3차 정신외과 연구 회의에서 발표된 모든 문헌 보고를 요약하면 정신외과수술로 인한 사망률(대부분 출혈로 인한 사망)이 0.85%∼2.50%로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평균보다 훨씬 높은 18%의 사망률을 보인 기관도 있었습니다.

수술 후 뇌전증 또한 정신외과수술의 주요 합병증 이었습니다. 1953년에는 약 10%의 환자가 뇌전증 관련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부 후속 연구에서는 그 수치가 52%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작은 항 경련제로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프리먼은 그의 경안와뇌엽절개술transorbital lobotomy이 다른 유형의 신경정신과 수술보다 뇌전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습니다.

뇌엽절개술 병변의 크기가 수술 후 몇 년 동안 증가한다는 발견도 있습니다. 한 병리학 연구에 따르면 병변 주변의 백질이 대식세포로 채워져 백질의 지속적인 파괴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또한 보고자들은 수술이 높은 수준의 정밀도로 수행된다고 주장했지만, 초기의 뇌엽절개술 절차는 실제로는 조잡하고 부정확했습니다. 부검에서 두개골의 관상 봉합coronal suture을 랜드마크로 사용했을 때 절개 부위는 환자 케이스마다 다 달랐습니다. 또한 경안와뇌엽절개술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부검 증거도 보고되었습니다. 외과의는 자신이 뇌 조직을 절단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수술 도구는 전두엽을 절단하지 못하고 옆으로 움직이게만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뇌 조직에 구멍만 남긴 채로 수술은 종료된 것입니다.

수술을 몇 건이나 했을까?

정신외과 시대에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수술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 방법은 사실 없습니다. 1942년부터 1954년까지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10,365명의 환자들이 뇌엽절개술을 받았으며, 추가로 762명의 환자들은 한 번 이상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모든 주립병원, 연방병원(재향군인병원 포함), 정신병동이 있는 종합병원, 사립 정신병원 및 의과대학 제휴 병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1949년 8월 15일까지 약 10,000건의 수술이 보고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병원들을 대상으로 한 후속 조사에 의하면 1951년 6월 30일까지 18,600건 이상의 수술이 추가로 보고되었습니다. 1954년 까지는 연간 최대 5,000건의 수술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는 상당히 적어졌습니다. 이는 정신외과수술에 대한 부정적 여론의 증가와 항정신병약물의 사용 증가로 인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신외과 활성화에 기여한 요인들

어떤 요인이 정신외과의 활성화에 기여했을까요? 첫째, 신체요법을 받고도 일시적 반응만 있거나 전혀 반응이 없는 입원 환자를 위한 다른 대체 요법이 없었습니다. 더 해줄 것이 없는 치료 불응성 환자도 수술 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극적인 증상 호전을 보였습니다. 둘째,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의 정신과 질환 입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했습니다. 1943년에는 10만 건의 새로운 정신과 입원이 있었지만 퇴원은 67,000건 뿐이었습니다. 1946년에는 271,000건의 입원이 있었고, 공립병원 병상의 절반을 정신질환자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환자 과밀이 발생하고 정신건강의 관리에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일부는 정신외과수술이 전국 병원의 입원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선진적 치료기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당시 연구 데이터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뇌엽절개술이 매우 효율적인 치료적 도구라는 결론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1930년 이전에는 조울증 진단을 받고 15년 이상 계속 입원한 환자는 결핵 및 기타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1.7%였고, 뉴욕주립병원의 치매 환자들은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25%였습니다. 따라서 국가 기관에서는 환자를 퇴원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 미국의학협회에서 많은 환자들을 지역사회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시술의 경제적 영향이 논의되었습니다. 환자를 지역 사회로 돌려보내면 매일 100만 달러를 절약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프리먼과 와츠는 일찍이 1940년부터 수술의 사회적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치료에 대한 저항이 심하고 파괴적인 환자들도 퇴원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고 협조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병원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난치성 환자의 절망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장기적인 검증과 객관적인 평가도 없이 의료계 내에서 정신외과수술이 폭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49년 모니스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언론은 정신병동의 비참한 상황을 널리 알리고, 정신외과의 성공을 위해 모니스의 노벨상 수상을 적극적으로 선전했습니다.

정신외과수술에 대한 논쟁

초기에 미국과 영국의 저명한 정신과의사들이 정신외과를 지지했습니다. 그리하여 정신외과에 대해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미국에서는 공개적으로 수술을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시술에 대해 회의적이며 그 결과에 대하여 우려했던 사람들도 다른 형태의 치료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한 일부 절망적인 환자에게 수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정신외과를 둘러싼 논쟁은 때때로 감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신외과 환자들은 뇌가 없는 로봇과 비교되었습니다. 또한 환자의 가족들은 병원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치료 방법에 동의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학자는 수술이 "영혼을 절단하는 부분적 안락사"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외과수술의 수용

처음에는 정신외과수술이 최후의 수단으로만 홍보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치료에 반응하지 않고 장기간 입원 중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력이 부족한 공공정신병원에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정신외과수술 후 많은 사람들이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질병 초기에 첫 치료로 수술을 사용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었습니다. 1948년 컬럼비아 대학의 학자들은 조현병 환자가 입원 첫해에 신체요법 후 개선이 보이지 않으면 뇌엽절개술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수술의 지연은 위험하다고 강조하며 환자가 절망적으로 악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가장 유감스러운 실수라고 덧붙였습니다. 1949년까지 프리먼은 정신외과수술은 절망적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54년 그는 3년 이상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들은 뇌엽절제술 후 병원 밖에서의 생활에 적응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보다 빨리 수술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리먼을 비롯한 사람들의 뇌엽절개술이 1차 치료라는 믿음은 경안와뇌엽절개술이 주립병원에서 널리 사용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정신외과수술에 대한 부작용과 우려가 문헌에서 점점 더 많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주립병원의 의료진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장기적 예후

1942년에서 1954년 사이에 단일 뇌엽절제술을 받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10,365명의 환자 중 9,284명에 대한 추적 데이터가 분석되었습니다. 그들은 41%가 크게 호전되었고, 28%가 일부 개선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25%는 변화가 없었고, 2%는 더 나빠졌으며, 4%는 수술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2,139명의 정동장애 환자에서 개선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63%는 회복되거나 크게 호전된 것으로 보고되었고, 19%는 일부 호전되었으며, 10%는 변화가 없었으며, 2%는 더 나빠졌으며, 6%는 사망했습니다. 6,146명의 조현병 환자 중 30%는 회복되었거나 크게 개선되었으며, 33%는 최소한으로 개선, 32%는 변화가 없었고, 2%는 더 나빠졌으며, 3%는 사망했습니다. 정동장애 환자는 조현병 환자보다 더 크게 호전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정동장애는 일반적으로 조현병보다 예후가 더 좋습니다. 정신외과수술에 대한 한 리뷰에서 수술을 받은 환자의 장기적인 예후가 질병의 자연적인 경과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향후 많은 연구가 수행되었으나 모순된 결과가 보고되었고, 연구들은 심각한 방법론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수행 된 정신외과수술의 효과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습니다. 진단의 부정확성, 수술 전 평가기준의 차이, 수술 후 결과에 대한 평가기준의 차이 때문에 수술 결과를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당시의 광범위하고 무분별한 수술행위는 예후를 나쁘게 하고 각종 합병증의 발생을 증가시켰습니다.

결론

역사적인 맥락에서 정신외과수술이 진보적 치료적 간주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상정신과학은 고전적인 정신외과시대 이후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고 오늘날 우리는 정신과적 증상과 치료 효능을 평가하기 위한 더 나은 연구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뇌의 해부학과 생리학을 보다 정교하게 이해하고 정신과 증상과 인지기능을 평가하기 위한 엄격한 측정 도구를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정신외과 시절의 사례를 통하여 치료 방법의 장기적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정신과적 결과에 대한 엄격하고 전향적인 장기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출처 :
https://ajp.psychiatryonline.org/doi/abs/10.1176/ajp.152.4.505?journalCode=ajp
https://journals.sagepub.com/doi/pdf/10.1177/00359157600530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