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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트다운(Piltdown)

Introduction

발견과정과 화석의 특징

최초의 영국인

1912년 여름의 첫 발굴은 믿을 만한 소수의 동료와 이루어졌다. 스미스 우드워드는 부인과 런던에서 내려와서 여관이나 도슨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의 회고록 <최초의 영국인The Earliest Englishman>에서 스미스 우드워드는 1912년의 발굴을 둘러싼 흥미로운 풍경을 묘사한다.

“땅 주인과 농부 모두 그의 목적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도슨씨에게 채석장을 발굴하도록 허락했다.... 첫 주 동안 자갈을 파고 옮기는 우리의 열의를 주변 이웃들은 호기심으로 바라봤다......다음 월요일 아침 지역 경찰관이 도슨씨의 사무실로 찾아와 신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에 익숙하지 않은 도슨씨는 경찰의 말을 인정하며 그가 한 말에 놀랐다. ‘런던에서 온 세 명의 신사가 채석장을 미친 듯이 파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도슨씨의 난처함이 상상이 간다. 하지만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경찰관에게 우리가 이웃에 있는 박편plint에 관심이 있으며 그를 신고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그림 필트다운의 자갈 구덩이에서 채로 흙을 거르고 있는 사진. 이 사진은 이후 필트다운을 기념하기 위한 엽서로 제작되며 찰스 도슨(왼쪽)과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오른쪽)의 얼굴 사진이 포함됐다.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확대 ▲ 그림 4. 필트다운의 자갈 구덩이에서 채로 흙을 거르고 있는 사진. 이 사진은 이후 필트다운을 기념하기 위한 엽서로 제작되며 찰스 도슨(왼쪽)과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오른쪽)의 얼굴 사진이 포함됐다.

도슨과 우드워드는 화석 발견을 비밀로 유지하길 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작은 구덩이를 팔 단 한 명의 노동자만 고용되었지만, 다음 해인 1912년 봄에는 예수회 소속의 유명 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파리 박물관의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Pierre Teilhard de Chardin이 스미스 우드워드와 도슨의 발굴팀에 합류했다. 그렇게 변호사, 고생물학자, 카톨릭 신부는 여름동안 자갈밭을 파고, 구덩이에서 찾은 발굴물을 자세히 조사했다. 1912년의 발굴 시즌 동안 도슨, 스미스 우드워드, 테야르는 멸종된 포유류 동물군과 인공유물, 인간의 유골 잔해를 발견했다.

유골 잔해는 서로 딱 맞는 7개의 두개골 조각과 턱뼈의 오른쪽 절반, 어금니 2개였다. 정확한 연대 측정 기술은 40~50년 후에나 개발되었지만, 짙은 갈색으로 변한 두개골의 색이나 발견된 자갈층의 위치, 그리고 함께 발견된 멸종 포유류 화석으로 보아 최소한 수십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림 1912년에 시작된 발굴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참여했다. 흙더미 위에 서 있는 일꾼과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있는 사진. 왼쪽은 도슨, 오른쪽은 우드워드 우드워드는 어류와 파충류 전문가였지만 혼자서 필트다운 화석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 자신보다 인간 해부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박물관 동료의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지 않고 혼자서 복원한 것이다.

확대 ▲ 그림 5. 1912년에 시작된 발굴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참여했다. 흙더미 위에 서 있는 일꾼과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있는 사진. 왼쪽은 도슨, 오른쪽은 우드워드.



확대 ▲ 그림 6. 필트다운 두개골을 상세하게 기록한 스케치. 위쪽은 조각난 두개골 3개, 아래쪽은 아래턱 4개

지질 협회 회의까지 필트다운 발견을 비밀로 유지하려는 우드워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2년 늦은 9월에 이르러서 “놀라운 해골”에 관한 소문이 영국의 매체 사이에서 돌았다. 결국 11월 21일 지역 신문인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에 다음과 같은 뉴스가 실렸다 “그것이 진품이라는 데에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의 유골일 가능성도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기사의 제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 기사에서는 ‘최초의 영국인’을 찾았다는 흥분과 기대감이 느껴진다.

1912년 12월 18일 수요일 저녁 지질학 협회의 회의장에는 필트다운을 실제로 보기 위한 참가자들로 가득 찼다. 두개골은 9개의 조각을 조합한 4개의 큰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스미스 우드워드는 지질학 협회의 발표에서 화석과 함께 호미닌 얼굴과 두개골 턱의 빠진 부분을 채운 화석의 첫 번째 복원을 공개했다. 도슨과 스미스 우드워드는 화석의 학명을 발견자를 기념해 “도슨의 가장 오래된 유인원”이라는 뜻의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Eoanthropus Dawsoni라고 지었다.

많은 참여자가 필트다운 화석에 흥분했는데, 인간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이 큰 뇌 덕분이라고 생각한 그 당시 유행 이론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필트다운의 화석 조각을 하나로 조립했을 때 ‘유인원의 턱’에 ‘인간의 두개골’을 가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화석이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완벽한 “읽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두개골의 형태와 모양은 인간 특유의 “커다란 뇌”를 강조하며, 우리 진화의 역사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뇌용적량을 획득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특징으로 필트다운 화석은 인간이 영장류 진화의 가장 끝에서 절정을 이룬다는 단선적인 진화 내러티브에 힘을 실어주는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필트다운이 발견된 해인 1912년의 영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 호주 전역에 걸쳐 성공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인들, 특히 교육을 많이 받은 중상류 계층의 사람들은 엄청난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전기, 항공, 대서양 횡단 운송, 철도, 통신, 자동차의 공급은 모두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발전과 희망을 암시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쥘 베른과 H.G.웰스 같은 인기 있는 '과학소설' 작가들 덕분이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이 언젠가는 모두를 위한 삶의 질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1914년과 1920년 사이에 전쟁과 스페인 독감의 결합은 세계를 황폐화할 것이었지만, 1912년에는 불행한 미래에 대한 전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필트다운인의 발견은 영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라는 믿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뇌가 큰 최초의 영국인’은 대영제국의 심장부에서 일군 또 하나의 승리였다.

큰 뇌 먼저? 직립자세 먼저?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1871)에서 인간의 초기 조상들이 유인원 조상의 특징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수컷들은 한때 커다란 송곳니 이빨을 가지고 있었지만 돌, 몽둥이 같은 무기를 싸움에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턱을 덜 사용했을 것이고, 송곳니의 크기도 줄었을 것이다. 이 같은 턱의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턱을 점점 더 적게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다윈은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이 같은 다윈의 관찰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로 턱 모양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정확한 발음을 위한 혀의 움직임에 필수적인 공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확대 ▲ 그림 7. 필트다운 화석이 발표되고 에 실린 필트다운 그림(1912년은) 인간과 거의 비슷한 모습의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가 창을 들고 사냥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둘째로 돌과 몽둥이를 다루는 능력은 직립 자세를 예상하게 된다. 언어와 직립 자세는 둘 다 상당한 정신적 능력의 발전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진화 경로에 대한 중대한 발전이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뇌의 발달이 먼저였을까? 직립 자세가 먼저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말하는 능력?

다윈은 이 질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축적되는 화석 기록은 어느 것이 먼저 발달했는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었다. 20세기 초까지 발견된 호미닌 화석 증거는 미미했지만, 분명 중요한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표본들은 네안데르탈인의 존재를 확인시켜 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아래턱뼈와 인도네시아에서 유진 뒤부아가 발견한 자바원인도 있었다. 이 화석들은 플라이스토세 시기의 조상들이 유인원과 같은 좁은 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남동쪽 아시아까지 전 세계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발견된 이 표본들은 앞다투어 인류 진화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발견을 통해 전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똑같은 종의 사례들이 여럿 등장했다. 이 표본들의 두개용량이 대략 850~110cc 사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덕분에 이들을 유인원 비슷한 선조(약 400cc)와 현대 인류(1200~1500cc 사이)의 중간 단계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뇌의 크기를 기반으로 잃어버린 고리가 실제로 발견됐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인류학 역사에는 어떠한 명백한 증거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가 발견된 것이다! 필트다운 화석은 커다란 뇌가 먼저 진화했다는 증거를 담고 있었다.

필트다운에 대한 반응

1912년 12월 화석을 처음 접했을 때, 필트다운 화석에 대한 과학계의 반응은 다양했다. 유명한 해부학자인 아서 키스Arthur Keith와 그래프트 엘리엇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고고학자 윌리엄 보이드 도킨스William Boyd Dawkins는 즉시 화석에 관한 2개의 중요 쟁점을 제기했다. 첫 번째로 그들은 두개골과 턱뼈의 조합을 문제 삼았는데, 턱과 두개골이 같은 개인의 것인지는 물론이고, 복원된 부분과 조각난 부분이 같은 종에 속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화석의 연대에 관한 것이었다. 필트다운 화석이 발견된 지층이 홀로세 시기의 비교적 최근 지층의 것인지, 혹은 더 오래된 플라이스토세 지층인지로 의견이 갈렸다. 만약 자갈층과 그 주변 성분이 더 오래된 지질 시기를 출처로 가진다면, 논리적으로 그 지층의 퇴적물에서 발견된 화석 성분들은 지질학적으로 더 오래된 성분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필트다운이 인간 진화의 계보에 들어가기에 적절한 화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대영 박물관의 해부학자 그래프트 엘리엇 스미스는 “어떻게 대자연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플라이스토세 시기 인간의 (턱뼈 없는) 두개골과 알려지지 않은 유인원 특징을 지닌 플라이스토세 유인원의 (두개골이 없는) 턱뼈를 같은 자갈층 지층에 두는 엄청난 장난을 친 것인가?”라며 이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없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20세기에 새롭게 발견된 화석들에는 한 가지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대 인류는 현대 인류보다 더 작은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도 과거로 갈수록 그 크기는 더욱 작아져서 유인원의 것을 닮았다. 그러나 이빨과 턱은 50만 년 전의 고대 인류의 것이라 하더라도 유인원의 이빨과 턱을 닮지 않은 완전히 다른 구조로 되어 있었다. 유인원들은 위 송곳니가 매우 커서 아랫니가 있는 곳까지 뻗어 있기 때문에 송곳니가 들어갈 틈인 치극이 아랫니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자바원인이나 하이델베르크인 및 그와 유사한 화석들에는 이런 유인원이 가진 특징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필트다운인은 유인원과 비슷한 턱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같은 씹는 면이 편평한 어금니를 가졌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필트다운인의 턱은 사실상 유인원의 턱과 같았다. 이와 같은 특징의 필트다운 화석은 다른 화석들의 증거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우월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지적 능력 때문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졌기 때문에 필트다운의 큰 뇌는 그런 편견이 옳다는 증거로 보였다. 결국, 필트다운인의 뇌가 크다는 사실은 다른 화석들보다 인간의 자긍심을 만족하게 해주었다. 유인원의 얼굴을 가졌더라도 두뇌가 큰 쪽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작은 두뇌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더군다나 필트다운인은 런던에서 불과 몇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고, 당대의 대가인 우드워드가 보증하는 화석이었다. 비록 다른 화석들과 일치하지 않는 특징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필트다운인을 의심할만한 이유보다는 믿을 이유가 더 커 보였다.

확대 ▲ 그림 8. 미국 신문인 의 필트다운 화석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는 1913년 기사. 제목은 <과학자들이 논쟁하고 있는 해골Skull over which scientists are disputing>

그렇지만 필트다운인의 진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특히 미국 고생물학자들은 필트다운 화석을 좀 더 냉정한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이 턱뼈와 두개골의 연관성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고대 유인원 화석이 최근의 인간 두개골의 파편이 들어 있는 퇴적물에 섞였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워싱턴 DC의 스미스 소니 언 연구소Smithsonian Institution의 포유류학자 게릿 밀러Gerrit Miller는 화석이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 놀라운 우연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두개골과 턱은 별개의 개체에 속하는 화석이라고 결론지었다. 밀러는 필트다운 턱의 독특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의 침팬지인 Pan vetus을 만들어 턱뼈의 주인일 것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논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이가 발견됐다. 신부 테야르는 1913년 발굴 현장에서 송곳니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유인원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 송곳니의 발견은 남은 회의론자들마저 설득시켰다. 한편 도슨과 스미스 우드워드는 1914년까지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그들의 협력은 1차 세계대전과 도슨의 건강 악화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15년에 도슨은 스미스 우드워드에게 처음 발견지에서 약 2마일 떨어진 곳에서 더 많은 유해를 발견했다고 편지를 보냈다. 이 발굴지는 필트다운2 구역으로 알려졌고, 이곳에서 에오안트로푸스의 두개골과 어금니, 코뿔소의 뼛조각을 추가로 발견했다.

1912년과 1913년 필트다운 발굴 시즌동안 스미스 우드워드는 지역 사진작가 존 프리스비John Frisby를 고용해서 발굴지와 발굴 모습의 사진과 필트다운 화석을 든 도슨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프리스비의 사진은 발굴지에 있는 스미스 우드워드와 도슨,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인부를 보여준다. 필트다운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사를 고용한 것은 발굴팀에게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말해준다.

확대 ▲ 그림 9. 지질학 협회의 회원들이 1913년 7월 12일 필트다운 발굴지 방문을 찍은 사진. 런던에서 기차로 방문 가능한 필트다운은 화석을 연구하는 전문가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에게도 접근이 쉬운 곳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다른 호미닌 화석들이 자바, 아프리카, 그림 지질학 협회의 회원들이 1913년 7월 12일 필트다운 발굴지 방문을 찍은 사진. 런던에서 기차로 방문 가능한 필트다운은 화석을 연구하는 전문가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에게도 접근이 쉬운 곳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의 교외처럼 연구자들이 쉽게 방문할 수 없는 곳에서 발견된 것과 대조적으로 필트다운 발굴 현장은 상대적으로 인류 진화를 연구하는 지식인들의 활동지와 가까웠고, 덕분에 필트다운은 연구자들이 직접 방문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이러한 특성으로 후에 유명한 과학자들의 보고서와 사진은 화석의 첫 발견에 정당성을 부여해 줬다. 발굴 현장의 존재는 자체가 화석에 도전하기 힘든 진정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의 과학계는 필트다운 화석을 믿게 되었다. 우드워드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는 이유로, 영국 외과의사회의 아서 키스는 그 발견물들이 자신이 이야기한 현생 인류의 형태가 오래되었다는 이론을 입증해 준다는 이유로 필트다운 화석을 받아들였다.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는 필트다운 화석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뇌의 진화가 가장 먼저 일어난 결정적 발달 과정이라고 하는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을 뒷받침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또한, 당시 영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프랑스나 독일에서 발견된 것보다 더 오래되었으면서도 인류에 더 가까운 화석의 존재는 정말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1918년까지 필트다운 화석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논쟁과 토의는 50명 이상의 과학자가 120편 이상의 문헌들을 발표하게 했다. 그러나 모든 의심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필트다운 화석은 점점 더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교과서에는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가 포함되기 그림 1938년 필트다운에서 아서 스미스가 기념비의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 기념비에는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여기 태고적 강의 자갈밭에서 로열 소사이어티의 회원인 찰스 도슨씨가 필트다운 화석 두개골을 발견했다. 찰스 도슨씨와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경은 지질학회의 계간지에 그 발견에 대해 기술했다”고 세겨져 있다. 시작했다.

확대 ▲ 그림 10.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전시했던 선사시대 인류의 조각상 왼쪽부터 자바원인, 필트다운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순서로 인류가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확대 ▲ 그림 11. 1938년 필트다운에서 아서 스미스가 기념비의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 기념비에는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여기 태고적 강의 자갈밭에서 로열 소사이어티의 회원인 찰스 도슨씨가 필트다운 화석 두개골을 발견했다. 찰스 도슨씨와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경은 지질학회의 계간지에 그 발견에 대해 기술했다”고 세겨져 있다.